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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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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사키 도요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부터 남북조 시대, 무로마치 막부에 걸쳐 활동한 무장이자 다이묘이다. 교고쿠 씨 출신으로,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호조 다카토키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이름을 얻었다. 고다이고 천황의 도막 운동과 겐무 신정에 참여했으나,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따라 무로마치 막부 수립에 기여했다. 오미, 히다, 이즈모 등 6개 국의 슈고를 역임하며 막부 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바사라 문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렌가, 다도 등 다양한 문화 활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경제적인 기반을 다져 일반적인 무사와는 다른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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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도요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사사키 다카우지
다른 이름교고쿠 다카우지
로마자 표기Sasaki Takauji
일본어 표기佐々木 高氏
출생1306년
사망1373년 9월 12일
직업시인
무사
관료
상세 정보
시대가마쿠라 시대 말기 - 남북조 시대
다카우지(高氏)
아명호보(峯方)
법명도요(導誉 / 道誉)
통칭시로(四郎)
관직시로사에몬노조(四郎左衛門尉), 사도노카미(佐渡守)
계명쇼라쿠지도노도쿠오도요(勝楽寺殿徳翁導誉)
묘소시가현이누카미군고라정 쇼라쿠지
시가현마이바라시 도쿠겐인
관위종5위하, 종5위상
소속 막부가마쿠라 막부 고쇼코슈
무로마치 막부 히키쓰케도닌, 효조슈, 만도코로 집사
영지와카사국
오미국
이즈모국
가즈사국
히다국
셋쓰국 슈고
주군호조 다카토키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아시카가 요시미쓰
씨족우다 겐지사사키 씨 서류 교고쿠 씨
아버지사사키 무네우지
어머니사사키 무네쓰나의 딸
양아버지사사키 사다무네
형제이케다 사다노부
가가미 사다우지
사사키 다카우지 (도요)
다카야 사다미쓰
이와야마 히데노부
구라토모 도키미쓰
사사키 쓰네우지
배우자니카이도 도키쓰나의 딸
기타
미마
자녀사사키 히데쓰나
사사키 히데무네
사사키 다카히데
아카마쓰 노리스케의 정실
시바 우지요리의 부인
롯카쿠 우지요리의 부인

2. 생애

2. 1. 가마쿠라 막부 시대

에이닌 4년(1296년), 오미의 지두인 사사키 씨의 분가인 교고쿠 씨에서 태어났다.[10] 가겐 3년(1305년)에 사망한 외삼촌인 사사키 사다무네의 뒤를 이어 가독을 상속받았다.[10] 쇼와 3년(1314년) 좌위문위에 위계되었고, 겐코 2년(1322년) 검비위사에 위계되었다.[18][10] 검비위사의 업무를 보기위해 교토에 주재하였고, 겐코(元亨) 4년(1324년)의 고다이고 덴노(後醍醐天皇)의 행행을 수행하였다.[18][10] 겐토쿠 원년(1329년) 부친 사사키 무네우지의 뒤를 이어 가독을 승계했으나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호조 다카토키의 측근으로 되었다.[18] 다카토키가 출가할 때, 함께 출가하여 법호를 도요로 정했다.[18][10] 사사키 도요는 호조 씨(가마쿠라 막부 제14대 싯켄) 당주인 호조 다카토키로부터 1자를 받아 이름을 지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이름을 지은 아시카가 다카우지(후의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동명이다.[9]

2. 2. 도막 운동과 겐무 신정

1331년, 고다이고 천황이 가사기 산에서 거병하여 도막 운동을 일으키자, 막부 측 진압군에 종군하여 겐코의 난 진압에 참여하였다.[10][18] 고다이고 천황오키 제도로 유배될 때 호송을 맡았으며,[10][18] 이후 고다이고 천황의 총신 기타바타케 도모유키를 가마쿠라로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막부의 명에 따라 오미 국 가시와바라(柏原, 마이하라 시 가시와바라)에서 도모유키를 처형하였다.[10]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이 반막부 활동을 지속하는 가운데, 1333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막부에 반기를 들고 단바 국 시노무라(교토 부 가메오카 시)에서 로쿠하라 단다이를 공격했다. 이 시기 사사키 도요의 행적은 1차 사료나 『바이쇼론』 등에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밀약을 맺었다는 일화나 오미 국 반바주쿠(番場宿, 사가 현 마이하라 시 반바)가 그의 영지였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호조 나카토키 군세가 렌게지에서 자결한 사건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0]

고다이고 천황이 오키를 탈출하고, 아시카가 다카우지, 닛타 요시사다 등의 활약으로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자, 고다이고 천황을 섬기며 겐무 신정에 참여하였다. 잡소결단소의 부교닌으로 활동하였다.

2. 3. 남북조 시대와 무로마치 막부

아시카가 다카우지겐무 신정에 반하여 거병하자, 사사키 도요는 다카우지를 따라 종군하였다. 1335년 나카센다이의 난 진압에 참여하고, 가마쿠라를 탈환한 다카우지로부터 가즈사와 사가미를 영지로 받았다.

겐무의 난에서 아시카가 측에 가담하여 닛타 요시사다와 싸웠으나 패배하고, 요시사다에게 항복하여 닛타 군에 종군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닛타 군을 배신하고 아시카가 측에 복귀하여, 아시카가 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규슈로 후퇴한 다카우지를 따르지 않고 오미에 남아 있었으나, 미나토 강 전투 이후 다카우지가 교토를 점령하자 다시 합류하였다.

오미 전투에서 시나노 슈고 오가사와라 사다무네(小笠原貞宗)와 함께 히에이 산을 포위하고, 고다이고 천황과 닛타 요시사다를 압박하였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묘 천황을 옹립하고 무로마치 막부를 수립하자, 막부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오미, 히다, 이즈모, 와카사, 가즈사, 셋쓰 등 6개 국의 슈고(守護)를 역임하였다.

간노의 소란에서는 아시카가 다카우지 측에 가담하여, 아시카가 다다요시 세력과 대립하였다. 쇼헤이 일통 이후 북조가 재건되자, 고코곤 천황을 옹립하고 천황의 할머니 사이온지 네이시(西園寺寧子)를 설득하여 즉위 의식을 거행하게 하는 등, 막부의 권력 강화에 기여하였다.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보좌하며 만도코로(政所) 집사(執事) 등을 역임하고, 슈고 다이묘(守護大名) 간의 항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호소카와 기요우지(細川清氏)와 시바 다카쓰네(斯波高経) 등 유력 다이묘들의 실각에 관여하고, 간레이(管領)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頼之)를 추천하는 등, 막부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373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3. 인물과 평가

사사키 도요는 남북조 시대 일본의 사회적 풍조였던 바사라(ばさら)를 좋아하였다고 하며, 일본의 고전 『태평기』(太平記)에 따르면 하극상적인 풍조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나 실각한 호소카와 기요우지(細川清氏)가 남조의 구스노키 마사노리(楠木正儀) 등과 함께 교토를 점거했을 때 자신의 저택에 불을 지르지 않고 꽃을 장식하고 연회를 준비하도록 시키거나 막부 내에서 대립하고 있던 시바 다카쓰네(斯波高経)의 꽃구경 권유를 무시하고 오바라노(大原野, 지금의 교토시 니시쿄구西京区)에서 성대한 연회를 여는 등 도요의 화려한 행동이 기록되어 있다.[10]

또한 렌카(連歌) 등의 문예나 꽃꽂이, 다도(茶道), 향도(香道), 피리, 나아가 오에 사루가쿠(近江猿楽)의 후원자가 되는 등 문화적인 활동을 좋아하는 한편으로 막부 정치에 있어서도 구게(公家)와의 교섭을 맡아 힘쓰는 등 문화적 소양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렌카시(連歌師)인 구사이(救済), 간파쿠(関白) 니조 요시모토(二条良基)가 찬한 『쓰쿠바슈』(菟玖波集)에는 도요가 지은 다수의 작품들이 실려 있다.[10] 다만 와카(和歌)에 대해서는 그가 읊은 한 수가 칙찬집에 실렸다고 전해질 뿐 문예 면에서는 오직 렌카에만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산문(山門)과는 묘호인(妙法院)을 공격하면서 불을 지른 사건에서 보이듯 대립하고 있었으나, 한편 산문의 말사(末社)인 히가시야마(東山)의 기온사(祇園社)와의 관계가 깊어 기온지의 숙사(宿舎)인 다카하시야(高橋屋)를 빌려 자신의 거처로 삼을 정도였다. 남조의 공격을 받고 미노(美濃)까지 물러난 요시아키라가 교토로 복귀할 무렵에는 이곳 다카하시야를 숙사로 삼아 교토 4조 거리의 쿄고쿠 저택보다도 이곳 타카하시야를 본거지로 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소유한 영지에 대해서는 운송 거점이 되는 지역을 바라는 경우가 많았는데, 앞에서 언급한 다카하시야가 소재한 곳도 교토의 상업 지역으로 유통이나 상업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호조 나카토키(北条仲時)를 포위한 이쓰쓰지노미야(五辻宮)에 의한 악당(悪党)、야마비토(山民)、야마호시(野伏) 집단에는 도요의 후원 내지는 도요가 주도적으로 관계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와 같이 도요는 소유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토대로 생계를 유지하던 당시의 일반적인 무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경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왕족이나 구게(公家) 귀족들에 대해서도 상대를 깔보거나 콧대 높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등, 여러 모로 괴짜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셋째 아들 다카히데(高秀)를 시켜 그리게 했다는, 불문에 들어 승려의 차림을 한 도요의 초상화가 일본 사가현(滋賀県) 고라정(甲良町)의 쇼라쿠지(勝楽寺)에 소장되어 있었으며, 이후 일본 교토 국립박물관(京都国立博物館)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아오노하라 전투(青野原の戦い) 뒤의 원군으로 「배수진」을 일본에서 최초로 사용한 무장으로써도 알려져 있다. 다만 사사키 도요가 배수진을 진언했다는 것은 군키모노(軍記物)인 『태평기』의 표현으로 역사적 사실로써는 도요가 실제로 배수진을 의식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3. 1. 바사라 다이묘

사사키 도요는 남북조 시대의 사회적 풍조였던 바사라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10] '바사라'는 기존의 권위나 질서를 부정하고, 화려함과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고전 『태평기』에는 도요의 화려하고 기발한 행동들이 기록되어 있다.[10] 1361년 도성 퇴각 때 도요는 자신의 저택을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 술을 대접하며 둔세자 2명을 배치했고,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이에 감동하여 그의 저택을 불태우지 않았다고 한다.[10] 1366년 오하라노 벚꽃놀이에서는 길이 1장 남짓의 놋쇠 꽃병에 벚나무 거목을 꽂아 장식하는 등 화려함을 뽐냈다.[10]

이러한 『태평기』의 기술은 신빙성에 의문이 있지만, 바사라의 사상과 감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10] 도요는 렌가, 덴가쿠, 사루가쿠, 다도, 향도, 입화 등 다양한 문화에 조예가 깊었다.[10] 특히 렌가에서는 『토큐파집』을 준 칙선집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의 작품 81개가 입집되었다.[10] 칸아미, 제아미와 교류하며 야마토 사루가쿠의 외호자였다는 설도 있다.[10]

도요는 교토의 상업 지역을 거점으로 삼고 유통과 상업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악당, 산의 백성, 노부시 집단 등과도 관계를 맺는 등 일반적인 무사와는 다른 경제 생활을 했다.

아오노하라 전투 이후의 원군에서, "배수진"을 일본에서 처음 사용한 무장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이는 군담물 『태평기』의 표현이며, 실제로 도요가 배수진을 의식했는지는 불분명하다.

3. 2. 문화적 소양

사사키 도요는 렌가, 다도, 향도, 꽃꽂이(生け花), 피리 등 다양한 문화 분야에 조예가 깊었다.[10] 특히 렌가에서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81수의 작품이 《쓰쿠바슈》(菟玖波集)에 수록되었다.[10] 사루가쿠에도 관심을 가져, 간아미(観阿弥)와 제아미(世阿弥) 등과 교류하며 야마토 사루가쿠(大和猿楽)를 후원하였다.[10]

고전 태평기에는 1361년 도성 퇴각이나 1366년 교토시니시쿄구 오하라노에서의 벚꽃놀이 연회 등에서 도요의 화려하고 기발한 행동이 기록되어 있다.[10] 1361년 도성 퇴각에서는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이끄는 남조 군대가 쳐들어오기 전, 자신의 저택을 방문하는 무사들을 대접하기 위해 여러가지 진귀한 예술품을 두고, 커다란 통에 술을 준비해 방문객 모두에게 술을 권하도록 했다.[10] 마사시게는 이에 감동하여 도요의 저택을 불태우지 말라고 명령했다.[10] 1366년에는 정적 시바 다카쓰구가 벚꽃놀이를 열려고 하자, 도요는 같은 날 오하라노에서 교토 내 예능인들을 모두 모아 벚꽃놀이 연회를 열어 다카쓰구의 체면을 떨어뜨렸다.[10]

이러한 『태평기』의 기록은 신빙성에 의문이 있지만, 바사라를 좋아했던 도요의 사상과 감성을 엿볼 수 있는 장면으로 평가된다.[10] 막부에서는 공가와의 교섭을 담당할 정도로 문화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었다.[10]

3. 3. 경제적 기반

사사키 도요는 소유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 외에 다양한 경제 활동으로 부를 축적했다.[10] 교토의 상업 지역에 거주하며 유통과 상업에 깊이 관여했고, 악당・산의 백성・노부시 집단과도 관계를 맺으며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다.[10] 이러한 점을 볼 때, 도요는 일반적인 무사와는 다른 경제 생활을 영위했음을 알 수 있다.[10]

도요는 산문과는 갈등이 있었지만, 산문의 말사인 히가시야마의 기온사와는 깊은 관계를 맺어 기온사의 숙소인 다카하시야를 자신의 숙소로 삼을 정도였다.[10] 남조의 공격으로 미노까지 피했던 요시미가 교토로 돌아왔을 때 다카하시야를 숙소로 사용했으며, 시조 교고쿠의 저택보다 다카하시야를 본거지로 삼았다.[10]

소령에서는 운송의 거점이 되는 지역을 원했으며, 다카하시야가 있는 곳은 교토의 상업 지역이었다.[10]

4. 가족 관계

사사키 도요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양부: 사사키 사다무네(1287-1305)
  • 아버지: 쿄고쿠 무네우지
  • 어머니: 쿄고쿠 무네쓰나의 딸
  • 장인: 쿄고쿠 사다무네
  • 형제: 쿄고쿠 사다우지, 쿄고쿠 도요, 쿄고쿠 사다미쓰, 쿄고쿠 히데노부, 쿄고쿠 도키미쓰, 쿄고쿠 쓰네우지
  • 부인: 니카이도 도키쓰나의 딸 (미카와노카미 도키쓰나의 딸, 실명 불명). 가마쿠라 막부·아시카가 막부의 유력 고케닌(정소 집사)인 니카이도 도키쓰나의 딸과 사사키 씨가 입장이 가까웠기 때문에 혼인이 이루어졌다고도 생각된다.
  • * "기타(北)":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이요 사사키가 문서"에 포함된 에이와 5년(1379년) 3월 8일자 아시카가 요시미쓰 소반소령 안도장에 따르면, 고라소 니코 향을 안도받은 도요의 아내로서 "기타"가 등장한다. 오안 6년(1373년)의 도요 사망에 즈음하여 출가하여 법명은 "류아"이다. 출신은 불명이다.
  • 자녀:
  • * 쿄고쿠 히데쓰나 (어머니 불명)
  • * 쿄고쿠 히데무네 (어머니 니카이도 도키쓰나의 딸)
  • * 쿄고쿠 다카히데
  • * 아카마쓰 노리스케의 부인
  • * 시바 우지사다의 부인
  • * 롯카쿠 우지요리의 부인
  • "미마": 오안 6년(1373년) 2월 27일자 도요 서장에 등장하는 인물. 만년에 이른 도요가 아들 다카히데에게 후사를 맡기고, 고라소 니코 향을 "미마"에게 양도하는 것을 기록한 서장으로, 내용은 "미마"에 대해 깊은 애정을 나타내고 있다. 도요의 손자인 로쿠로자에몬(다카히데의 아들 다카히사)라는 설과, 도요의 아내 "기타"라는 설이 있다.

5. 관련 작품

사사키 도요는 여러 소설, 텔레비전 드라마, 만화 작품의 소재로 다루어졌다.


  • 소설
  • 야마다 후타로 『바사라』(고단샤, 1993년) 후 가와이데 문고
  • 기타가와 겐조 『도요나리』(주오코론샤, 1995년) 후 주코 문고
  • 하뉴 미치히데 『사사키 도요』(PHP 연구소, 2002년)
  • 아베 류타로 『도요와 마사시게』(슈에이샤, 2009년) 후 슈에이샤 문고
  • 텔레비전 드라마
  • 『태평기』(NHK 대하드라마, 1991년) 배역: 진나이 타카노리
  • 만화
  • 마츠이 유세이도망치는 건 잘하는 젊은 영주』(슈에이샤, 2021년 ~) 또한, 해당 작품에서는 앞서 언급된 『미마』를 『미마』로 표기하며, 딸로 해석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Breaking Down Barriers: A History of Chanoyu Yale Art Gallery
[3] 문서 Watanabe p 50
[4] 웹사이트 佐々木高氏 https://kotobank.jp/[...]
[5] 서적 鎌倉・室町人名事典 新人物往来社
[6] 문서 山門神輿造替沙汰被執行之。惣奉行人佐々木高秀。親父道誉去八月廿五日他界之間。……
[7] 문서 佐々木佐渡大夫判官入道道誉帰寂於江州
[8] 서적 寛政重修諸家譜
[9] 서적 下野足利氏 戎光祥出版
[10] 논문 大山眞一「中世武士の生死観(7)―『太平記』における「死にざま」と「生きざま」の諸相」日本大学大学院総合社会情報研究科紀要 No.10, 343-354 (2009) https://atlantic2.gs[...] 日本大学 2021-01-10
[11] 서적 貴重書解題 第六巻
[12] 서적 滋賀県の地名 平凡社
[13] 웹사이트 佐々木高氏 https://kotobank.jp/[...]
[14] 문서 『花営三代記』 오안 6년 12월 27일조.
山門神輿造替沙汰被執行之。惣奉行人高秀。親父道誉去八月廿五日他界之間。……

[15] 문서 『常楽記』 오안 6년 12월 27일조.
佐々木佐渡大夫判官入道道誉帰寂於江州

[16] 서적 『간세이 중수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
[17] 논문 紺戸淳 「武家社会における加冠と一字付与の政治性について」(『中央史学』二、1979年、p.11〜14)、臼井信義 「尊氏の父祖 ―頼氏・家時年代考―」(수록: 田中大喜 編著『シリーズ・中世関東武士の研究 第九巻 下野足利氏』(戎光祥出版、2013년)、p.69).
[18] 웹사이트 大山眞一「中世武士の生死観(7)―『太平記』における「死にざま」と「生きざま」の諸相」日本大学大学院総合社会情報研究科紀要 No.10, 343-354 (2009) https://atlantic2.gs[...] 2021-01-10
[19] 문서 황족으로 출가한 승려를 가리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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